아름다움이 우리 내면에서 발생하는 과정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흄은 유용성의 예를 통하여 이를 설명한다. “어떤 동물에게는 힘을 자아내는 어떤 형태가 아름다우며, 다른 동물에게는 날렵함의 표지가 아름답다. 어떤 궁전이 보여주는 질서나 적합성도 그것의 단순한 형태나 외관 못지않게 그 아름다움의 본질적 구성 요소다.” 유용성을 처음으로 아름다움의 속성으로 제시했다고 알려진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다. 그에 따르면 달리기 선수와 레슬링 선수의 몸이 지니는 아름다운 형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신체가 아름다운가는 그것이 그들의 직업에 적합한 모습을 지니는가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주장을 편 뒤로 오랫동안 유용성 혹은 적합성은 아름다움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렇다고 흄이 대상이 지닌 유용성이라는 성질이 곧 아름다움의 본질적 성격이라는 주장을 답습한 것은 아니다. 유용성이 즐거움의 감정을 유발할 때 그 즐거움의 감정이 바로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대상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답다고 간주된다.” 여기서도 대상이 아름답다고 말해지기는 하지만 대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대상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즐거움의 발생이라는 효과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유용한 것이 모두 즐거움을 제공하는지, 그렇게 유발되는 즐거움은 언제나 아름다움인지 등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사실 당대의 많은 학자가 유용성이나 적합성을 아름다움의 속성에서 제외하려고 했다. 에드먼드 버크 같은 이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멧돼지의 코가 땅을 파서 식물의 뿌리를 캐서 먹기에 적합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돼지 코를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반례로 든다. 반면 흄은 유용성을 아름다움의 매우 중요한 구성 요소로 제시했다.
흄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즐거움의 제공을 그 본질적 특성으로 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그것이 지닌 유용성이다. 따라서 유용성은 아름다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설명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앞서 언급한 버크의 반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 장미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 과연 장미의 어떤 유용함이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이렇듯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어떤 대상들이 유용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유용성을 아름다움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끝까지 몰고 가서 아름다움의 본질적 특징을 무관심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이르러서다. 칸트는 이로써 도덕적 선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이나 본능적 욕구의 충족이 야기하는 쾌감과 아름다움이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 성공한다.
앞서 보았듯 흄은 대상이 아름답다고 말해지는 것은 그것이 즐거움을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즐거움과 고통은 아름다움과 추함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즐거움은 아름다운 대상이 주는 효과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런데 이렇게 상반되는 견해들이 따로따로 제시되기만 했다면 『인간본성론』에서 제시된 아름다움에 대한 흄의 이론은 모순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흄도 이런 상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이론 사이의 절충을 시도한다. 아름다움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즐거움을 자아내는 능력이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특정한 성질을 갖춘 대상의 능력인지, 아니면 인간의 아니면 인간의 정신적 능력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전통적 견해와 새로운 견해가 불분명하게 봉합된 채로 『인간본성론』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는 끝을 맺는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오늘날 흄의 미학이론 해석을 두고 견해가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인간본성론』에 나타난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를 흄의 미학 사상이 성숙하기 이전의 형태로 해석하고 후기에 가서는 이러한 미성숙함이 극복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보기에 후기로 갈수록 흄이 더욱 분명하게 아름다움을 정감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흄이 아름다움과 대상의 속성을 연결시키고 유용성을 아름다움의 중요한 원인으로 파악했던 전기의 견해들을 전적으로 폐기한 것은 아니다.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에서도 아름다움은 여전히 “신체 기관 혹은 정신 능력들과 대상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거나 그것들이 상응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또 흄은 예술 작품을 평가할 때 작품의 창작 의도를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다른 산물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 작품도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지니며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에 얼마나 적합한가에 따라 그것이 얼마나 완벽한가가 판단될 수 있다. 연설의 목적은 설득하는 것이며, 역사의 목적은 가르치는 것이고, 문학의 목적은 정념들과 상상력을 통해서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용성이 어떤 대상에게 부여된 목적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만큼 흄이 여전히 아름다움을 대상의 객관적 속성과 결부시켜 해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본질을 정감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흄의 견해가 혁명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상의 객관적 성질이나 유용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