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zin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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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terview
    • 2025

      그래픽 디자인은 외부와 함께 작동하는 영역인데 전시에서는 그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온전히 혼자 출발하게 되므로 그것을 역으로, 개인적 주체가 외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로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관점을 좀 더 내밀하게 드러내는 이벤트라고 느낍니다. – 디자인사학회 뉴스레터 24호

    • 2024

      결과물이 시각 언어이기 때문인지, 저는 오히려 텍스트나 개념처럼 비가시적인 요소에서 많은 힌트를 얻어요. 작업을 할 때도 내용에서 뻗어나가는 리서치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이를테면 주제와 관련된 인물, 텍스트, 사건, 작품 등을 조사하고 연결 지으며 작업의 내러티브나 배경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좋아해요. 그렇게 다층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 자체가 흥미롭죠. – Creator +

    • 2024

      정말 죄송하지만, 영감의 출처를 묻는 것은 다소 진부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다들 알잖아요. 영감이 어딨습니까…그냥 미친 듯이 계속하는 수밖에 없죠.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는… –  Be(Atitute)

    • 2023

      저는 책을 만났을 때, 그냥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책 안에 담을 내용이 어떤 그래픽 구조 안에서 드러나야 하는지를 첫 번째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 Platform P

    • 2023

      시간은 전시 기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전시 그래픽 디자인의 직능을, 공간은 오랫동안 불변하며 그 자리에 존재하는 건축물과 주변 장소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 국립현대미술관 뉴스레터

    • 2023

      작업 과정에서 파생되는 리서치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 이때 텍스트를 많이 참조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어느 정도 있고 내용이 다방면으로 살펴볼 구석이 있는 것이라면 주제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사전적 의미부터 인물, 역사적 흐름, 관련 출판물, 연결된 사건들 등과 같은 것을 꼬리물기 식으로 확장해 나갑니다. 이후 이러한 단서들을 하나의 주제의식 아래 연결 지어 네러티브를 만든 후 시각 결과물을 제안하면 작업을 설명하는 배경이 풍성해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직지소프트

    • 2022

      예산에 제한이 없고, 환경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가? : 가제본을 여러 번 만들어보고 싶다. – 월간 디자인 2022년 10월호

    • 2021

      타이틀 글자의 가독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오타가 발생해도 눈에 잘 띄지 않아요. 단점이면서 동시에 장점으로 기능하죠. – BeAttitude

    • 2020

      Today’s Korean Design: Attitudes of 13 Korean Designers – 360 design magazine

  • Article, Critic
    • 2025

      This exhibition is by no means a conclusion to this idea – an exhibition should never show a conclusion, but rather a set of follow up questions. – It’s Nice That

    • 2024

      The exhibition title BHLNTTTX embodies an alphabetical rearrangement that strips vowels from the words EXHIBITION TITLE. This mirrors the sense of disassembly and reconstruction inherent in Hezin O’s artistic process. – POST/NO/BILLS #5 BHLNTTTX, Stedelijk Museum Amsterdam, NL

    • 2024

      겸손함은 다양한 의미와 맥락을 포함한 말이다. 오혜진의 『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은 그중에서도 소박함과 검박함에 가까운 겸손함을 지닌 책이다. 책 전체는 건조한 모놀로그처럼 흑백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사용한 재료는 수더분하고 지질의 발색이 화사하지 않으며 어둑어둑하다. 손에 쥐면 가볍고 후들거리지만 뭉툭하게 부푼 감각도 느껴진다. 조도와 채도를 의도적으로 낮춘 어두운 회색 방처럼 푸석푸석하고 먹먹한 감각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일종의 구도적이거나 금욕적인 상징으로 만들어진 책일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 생각이 달라진다. 실제로는 책의 구성 요소들을 지나칠 정도로 매만지고 다듬어 세공하듯이 깎아 내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언뜻 무심하고 일상적인 물건 같지만 그와 같은 감각은 미시적인 세부를 세심하게 계산해 연출한 것에 가깝다. – Best Book Design from the Republic of Korea 심사평

    • 2024

      Korean designer O Hezin recently held a show at the Stedlijk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and Design in the Netherlands. O completed her MFA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Seoul and her BFA at Hongik University. Her work has continued to grow in conceptual depth and formal complexity, by which she explores the graphic textures and typographic layers of Korean visual culture. – It’s Nice That

    • 2024

      Graphic design as a Tool to understand the world, Grafis Masa Kini

    • 2023

      Meanwhile, Hezin O was given copious amounts of space to flesh out her research-driven practice within Hubert’s maximalist vision. This was a creative choice that led to subtle but impactful idiosyncrasies, like the fabric collection series being printed on very thin paper to give the impression of a fabric pile. – l’idiot utile (“the useful idiot”) is a magazine dedicated to the thankless work of creatives, It’s Nice That

    • 2023

      Best Book Design from the Republic of Korea 심사평

    • 2021

      월간 <디자인>이 주목한 디자이너 14팀, Monthly Design

    • 2020

      This Just In: Contemporary Design of South Korea, Letterform Archive

    • 2020

      Once to Watch 2020, It’s Nice That

    • 2019

      Natasha Jen, Liza Enebeis, Rachel Dalton and Hezin O discuss the state of graphic design – over WhatsApp, (It’s Nice That)

    • 2018

      New work by Hezin O explores the techniques of print, both physically and conceptually, (It’s Nice That)

    • 2017

      Hezin O’s portfolio is a refreshing mix of considered and well-executed projects (It’s Nice That)

  • Essay, Publishing
    • 2025

      라운드테이블, 「얽힌 이야기」, 『ANNEX 1』

    • 2024

      Artist book, 『Reprint: Selected work 2019-2023』

    • 2023

      비평, 「재단선 경계 흐리기」, 『글짜씨23』

    • 2023

      에세이, 「미술관 읽기」,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각주 도록』

    • 2022

      에세이, 참조할 것인가 말 것인가

    • 2021

      에세이, 0.1평 문서

    • 2021

      비주얼 에세이, MIRRORS-Millennials,  Idea Magazine

    • 2020

      에세이, 백지에서 시작할 수는 없잖아요

    • 2019

      노트, A4 drawing

    • 2019

      에세이, 형식을 내용으로 삼기

    • 2015

      에세이, RISO TOUR

  • Quotation
    • 영화감독 트린 T.민하는 내 체험 바깥에 있는 문화에 “관해 말하기”(speaking about)보다 그 “근처에서 말하기”(speaking nearby)를 제안한다. 「아트포럼」과의 인터뷰에서 트린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에 관해 말하기보다 근처에서 말하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과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잠재적 간격을 인정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대표성의 공간을 남겨두는 거죠. 그리하여 당신이 대상자와 아주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대표하거나, 대신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여 발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직 근처에서, 즉 가까운 거리에서 말할 수 있을 뿐이며(그 타자가 물리적으로 현존하든 부재하든), 봉쇄되지 않게 하고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타자가 그리로 들어와 그 자리를 원하는 방식으로 메울 수 있게 됩니다. 이 접근 방식은 양자 모두에게 자유를 주며, 아마 이런 비유에서 이 방식의 강력한 윤리적 견지를 알아본 영화인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권위자의 위치를 점하려고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전지전능의 주장과 지식의 위계에 따라 생성되는 무수한 판단 기준으로부터 당신은 사실상 자유로워집니다.”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노시내 옮김, 마티(2021), 143p
    • 제3의 관광객 유형이라는 삶의 방식을 권유한다. 마을 사람임을 잊지 말고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노이즈(noise)로 여행을 이용하기.

      아즈마 히로키, 『약한 연결』, 「경박하고 무책임한 ‘관광객으로서의 삶’」, 북노마드(서울: 2021 초판 4쇄), 51p
    • 우리는 입체적으로 올록볼록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 화가가 만든 평평하게 물결치는 공간에 잠겨들기도 하고, 그래픽 디자이너가 구축한 평평하고 견고한 정보 공간에 머무르기도 한다. 이런 평면들은 단순히 납작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책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책 속의 공간은 멀리 있는 것이 작게 보이는 삼차원 공간이 아니지만, 두 개의 축 방향으로만 연장될 수 있는 이차원 공간도 아니다. 책의 내용은 일차원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여러 차원으로 확장된 구조를 형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책의 물질적 형태는 제한된 크기의 평면을 기본 단위로 축조된다. 삼차원을 진짜처럼 구현하고 싶다는 주기적인 욕구의 분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주하는 미디어 환경은 대체로 평면을 기본 단위로 한다. 우리는 먼 옛날부터 평면을 이용하여 단조로운 삼차원 공간을 좀 더 복잡하고 풍부하게 확장해 왔다.

      윤원화, 『그림 창문 거울』 (보스토크 프레스: 2018) 68p
    • 텅 빈 공간을 다룬, 가장 잘 알려진 전시는 이브 클랭의 《텅 빔》이다. 이 전시는 1958년 봄에 파리 이리스클레르갤러리에서 열렸다. 클랭은 갤러리의 모든 것을 제거했고 벽은 온통 흰색으로 칠했다. (…) 클랭이 텅 빈 공간을 선보인 이후로 많은 전시가 개최되었다. (…) 1968년에 열린 다니엘 뷔랑의 첫 번째 개인전 《보기에 관하여》 (…)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열린 로버트 배리의 순회전 《문 닫은 갤러리 작품》 (…) 한편 로리 파슨스는 1990년에 한 전시에서 텅 빈 갤러리를 선보였는데, 이 경우는 갤러리 공간이 비었을 뿐 아니라 전시 초대장의 전시 제목란과 예술가 이름란도 비어 있었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대형 전시 《텅 빔, 한 회고전》(2009)의 주제이자 내용도 텅 빈 갤러리였다. (51-52p)

      우리는 시간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조합해서 주위 환경을 감지한다. 물리적 공간을 이해하는 가장 주요한 방법은 그것을 듣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간의 크기나 그 재료(이를테면 표면이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등 여러가지 요소들을 알아낼 수 있다. 공간을 듣는 능력이 사라지면 우리는 마치 무반향실 안에 있는 것처럼 고립되거나 방향 감각을 잃었다고 느낄 것이다. (…)블레서와 샐터는 ‘청각적 건축(aural architecture)’을 논의한다. 이 개념은 ’듣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experienced)공간의 특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05p)

      케일럽 켈리 지음 『갤러리 사운드』 배혜정, 지가은 옮김 (미진사: 2023)
    • 만화든 완구든 그 자체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품들을 그 부분으로 갖는 ‘커다란 이야기’ 혹은 질서가 상품의 배후에 존재함으로써 개별 상품이 비로소 가치를 가지고 소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비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자신들이 ‘커다란 이야기’의 전체상에 가까워진다고 소비자가 믿게 함으로써 같은 종류의 무수한 상품(<빗쿠리만> 스티커의 경우는 772장)이 팔리게 된다. <기동전사 건담> <세인트 세이야> <실바니아 패밀리> <오냥코 클럽> 같은 상품은 모두 이 메커니즘에 따라 배후에 ‘커다란 이야기’ 혹은 질서를 마련해두고 이것을 소비자가 알아차리게 함으로써 구체적인 ‘물건’을 파는 것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관심이 특정한 마니아에 한정되어 있는 동안은 문제가 없었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완구 같은 한정된 분야와 관련해서는 이것이 분명히 소비자의 공통감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소비사회가 맞이하고 있는 새로운 국면을 확인할 수 있다. 소비되고 있는 것은 하나하나의 ‘드라마’나 ‘물건’이 아니라 그 배후에 감추어져 있을 시스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커다란 이야기) 자체를 팔 수는 없으므로 그 한 단면인 한 회분의 드라마나 한 단편으로서의 ‘물건’을 겉보기로 소비하게 한다. 이와 같은 사태를 나는 ‘이야기 소비’ 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

       

      그러나 이와 같은 ‘이야기 소비’를 전제로 하는 상품은 극히 위험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즉 소비자가 ‘작은 이야기’의 소비를 계속한 끝에 ‘커다란 이야기’ 즉 프로그램 전체를 손에 넣게 되면 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작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케이스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인 제작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누군가가 ‘수퍼 제우스’로 시작하는 772장의 빗쿠리만 스티커 중 한 장을 그대로 복사한 스티커를 만든다면 이것은 범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티커는 ‘가짜’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얼마든지 있었던 사건이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빗쿠리만’의 ‘세계관’에 따라 이것과 정합성을 가지면서 772장의 스티커에 그려져 있지 않은 773명째의 캐릭터를 만들어내어 이것을 스티커로 판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772장의 오리지널 중 어느 것도 복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는 ‘가짜’가 아니다. 더구나 773장째의 스티커로서 772장과의 정합성을 갖고 있는 셈이니 오리지널인 772장과도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이야기 소비’의 위상에서는 이와 같은 개별 상품의 ‘진짜’ ‘가짜’의 구별이 불가능한 케이스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2007) 64-66p
    •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근무를 시작했을 때 수집할 소장품으로 가장 먼저 제안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베레타 권총이었어요. 당시 뉴욕 경찰청이 이탈리아에서 제조한 베레타 권총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베레타 권총의 디자인 자체가 무척이나 흥미로웠죠. 쓰이는 목적과는 별개로 대단히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뉴욕 현대미술관의 수집 위원회에 제안했고 확고한 답변을 받았어요. “안 됩니다. 우린 무기를 수집하지 않습니다.” 회화와 조각 컬렉션만 보더라도 총을 표현한 작품이 정말 많은데 이런 답변을 받으니 당황스럽더군요.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자 디자인 작품을 소장하면 보이는 것이 전부이지 예술품처럼 표현으로서 볼 수 없다, 그 물건의 기능을 인정하고 심지어 환영하기도 하는데 베레타 권총의 경우에는 그것이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라는 거예요. 디자인에는 본질적으로 기능과 연결되어 있어서 예술과 구별되는 직접성이 있다는 이유인데 참 흥미로운 논쟁이죠.

      풀러 왓슨, 『뉴 큐레이터』 김상규 옮김 (2023: 안그라픽스) 379p
    • 예술가의 일을 게으름, 무위, 쓸모없는 일-효율성에 집착하는 사회에서는 게으름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과 등치시킴으로써, 이 글은 예술과 일의 문제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스틸리노비치의 말처럼, 오늘날 예술가는 자신의 창의적 작업이 진짜로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일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실제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지라도, 모든 활동은 목적을 가져야 하며 시장가치를 얻어야만 한다. (…)

      스틸리노비치의 선언문에 추가해야 할 것은 오늘날 예술가가 수행하는 엄청난 양의 일로 인해, 예술가는 자본주의적 노동 이데올로기의 핵심에 있는 진정한 게으름을 드러낼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가는 예술가로 남으려면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 그게 예술가가 끊임없이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일에 관해 끊임없이 비판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아무리 게으른 행위일지라도, 반드시 일로 전환되어야 한다. 예술가가 그 전환을 직접 하지 않으면, 그 예술가의 일을 일로 가시화하고 평가하는 다른 제도나 시스템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자신의 무용한 일에서 그 어떤 게으름의 흔적도 지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에 자리 잡고 이쓴 진짜 게으름을 비출 수 있는 그 어떤 비판적 힘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만다.

      보야나 쿤스트 「예술과 노동」, 김신우 옮김,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 231 -232p
    • 페렉 스스로 글쓰기란 ‘이미 쓰인 모든 작품에 대한 독서’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자주 강조한 바가 있다. “모든 텍스트는 인용문들의 모자이크이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병합이자 변형이다”라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급처럼(『세미오티케』), 페렉에게 있어서도 글쓰기란 결국 “타자의 내재화” 작업이며 하나의 작품은 작가가 읽은 모든 책의 단편들이 마치 조각처럼 서로 끼워 맞춰져 있는 “거대한 하나의 퍼즐”이다.

      조르주 페렉, 『겨울 여행/어제 여행』, 김호영 옮김, 문학동네(2014), 88p
    • 처음에 디자이너의 위상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에릭 트론시가 기획한 전시였는데, 우리는 초대장 디자인을 의뢰 받았습니다. 에릭이 우리를 굉장히 멋진 디자이너라고 생각했거든요. 미술계가 처음으로 우리를 살짝 훔쳐보는 것 같았습니다. 초대장을 디자인하면서 거기에 적힌 미술가 명단을 보고, 우리는 여기 있는 모든 미술가만큼 우리도 출중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 이름을 초대 명단에 추가했습니다. 초대장 제작자는 우리 친구였는데, 그녀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일을 진행시켰어요. 물론 이 일은 엄청난 드라마로 이어졌죠. 당시 사무실 자동 응답기에 남겨진 메시지는 이랬습니다. “당신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중에 초청장이 배포되었을 때, 초대 명단 중간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습니다. 미술가 명단에서 우리 이름이 삭제된 거죠.

      M/M 「영국 왕립예술학교 데이비드 블래미와의 토론」 중 (2006)
    • ‘착영화’는 문자 그대로 ‘그림자를 잡는 그림’을 뜻하며, 우치다는 ‘착영화’ 표기 옆에 ‘후오도쿠라히’라는 가타카나를 달아 음운을 명시했다. ‘후오도쿠라히’는 ‘포토그래피’의 음독이므로 그가 ‘착영화’를 ‘포토그래피’의 번역어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김계원, 『19세기 후반, 사진(들)의 시작』, (현실문화: 2023), 123p
    • 아름다움이 우리 내면에서 발생하는 과정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흄은 유용성의 예를 통하여 이를 설명한다. “어떤 동물에게는 힘을 자아내는 어떤 형태가 아름다우며, 다른 동물에게는 날렵함의 표지가 아름답다. 어떤 궁전이 보여주는 질서나 적합성도 그것의 단순한 형태나 외관 못지않게 그 아름다움의 본질적 구성 요소다.” 유용성을 처음으로 아름다움의 속성으로 제시했다고 알려진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다. 그에 따르면 달리기 선수와 레슬링 선수의 몸이 지니는 아름다운 형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신체가 아름다운가는 그것이 그들의 직업에 적합한 모습을 지니는가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주장을 편 뒤로 오랫동안 유용성 혹은 적합성은 아름다움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렇다고 흄이 대상이 지닌 유용성이라는 성질이 곧 아름다움의 본질적 성격이라는 주장을 답습한 것은 아니다. 유용성이 즐거움의 감정을 유발할 때 그 즐거움의 감정이 바로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대상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답다고 간주된다.” 여기서도 대상이 아름답다고 말해지기는 하지만 대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대상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즐거움의 발생이라는 효과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유용한 것이 모두 즐거움을 제공하는지, 그렇게 유발되는 즐거움은 언제나 아름다움인지 등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사실 당대의 많은 학자가 유용성이나 적합성을 아름다움의 속성에서 제외하려고 했다. 에드먼드 버크 같은 이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멧돼지의 코가 땅을 파서 식물의 뿌리를 캐서 먹기에 적합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돼지 코를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반례로 든다. 반면 흄은 유용성을 아름다움의 매우 중요한 구성 요소로 제시했다.

      흄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즐거움의 제공을 그 본질적 특성으로 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그것이 지닌 유용성이다. 따라서 유용성은 아름다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설명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앞서 언급한 버크의 반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 장미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 과연 장미의 어떤 유용함이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이렇듯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어떤 대상들이 유용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유용성을 아름다움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끝까지 몰고 가서 아름다움의 본질적 특징을 무관심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이르러서다. 칸트는 이로써 도덕적 선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이나 본능적 욕구의 충족이 야기하는 쾌감과 아름다움이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 성공한다.

      앞서 보았듯 흄은 대상이 아름답다고 말해지는 것은 그것이 즐거움을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즐거움과 고통은 아름다움과 추함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즐거움은 아름다운 대상이 주는 효과가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런데 이렇게 상반되는 견해들이 따로따로 제시되기만 했다면 『인간본성론』에서 제시된 아름다움에 대한 흄의 이론은 모순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흄도 이런 상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이론 사이의 절충을 시도한다. 아름다움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즐거움을 자아내는 능력이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특정한 성질을 갖춘 대상의 능력인지, 아니면 인간의 아니면 인간의 정신적 능력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전통적 견해와 새로운 견해가 불분명하게 봉합된 채로 『인간본성론』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는 끝을 맺는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오늘날 흄의 미학이론 해석을 두고 견해가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인간본성론』에 나타난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를 흄의 미학 사상이 성숙하기 이전의 형태로 해석하고 후기에 가서는 이러한 미성숙함이 극복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보기에 후기로 갈수록 흄이 더욱 분명하게 아름다움을 정감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흄이 아름다움과 대상의 속성을 연결시키고 유용성을 아름다움의 중요한 원인으로 파악했던 전기의 견해들을 전적으로 폐기한 것은 아니다.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에서도 아름다움은 여전히 “신체 기관 혹은 정신 능력들과 대상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거나 그것들이 상응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또 흄은 예술 작품을 평가할 때 작품의 창작 의도를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다른 산물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 작품도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지니며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에 얼마나 적합한가에 따라 그것이 얼마나 완벽한가가 판단될 수 있다. 연설의 목적은 설득하는 것이며, 역사의 목적은 가르치는 것이고, 문학의 목적은 정념들과 상상력을 통해서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용성이 어떤 대상에게 부여된 목적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만큼 흄이 여전히 아름다움을 대상의 객관적 속성과 결부시켜 해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본질을 정감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흄의 견해가 혁명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상의 객관적 성질이나 유용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흄,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 김동훈 옮김 (마티: 2019) 145-149p
    • 위상적(topological)으로 생각하면 구멍을 뚫는 것으로 내부와 외부의 반전이 가능해진다. 즉, 뒤집는 것이 가능하며 양의성을 띤다. 구멍 안쪽에 양의성을 가진 피부가 있다. 내피는 외피가 연장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고 반대로 외피는 내피가 연장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구멍 안에 발생하는 것이 꿈인지, 반대로 구멍 안에 발생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이고 세상이 꿈인지, 두 가지 해석이 탄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멍이 양의성을 낳고 두 가지 스토리가 겹친 상태가 탄생한다.

      구마 겐고, 『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 이정환 옮김 (나무생각: 2023), 165p
    • 화가의 시선은 우리가 소재의 자리에 있는 경우에만 우리에게로 향한다. 관람자로서 우리는 추가 요소일 뿐이다. 우리는 화가의 시선에 받아들여지지만 또한 화가의 시선에 의해 축출되고 우리보다 먼저 언제나 거기에 있던 것, 즉 모델로 교체된다. 그러나 역으로 화가의 시선은 그림의 바깥으로, 화가와 마주대하는 허공을 겨냥하는 것으로서, 관람자들이 오는 그만큼 많은 모델을 받아들이는 셈이며, 그 명확하나 중립적인 장소에서 주시하는 자와 주시되는 자는 끊임없는 교환에 가담한다. 어떤 시선도 안정적이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해 캔버스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시선의 중립적 궤적 속에서 주체와 객체, 관람자와 모델의 역할이 한없이 뒤바뀐다.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민음사: 개역판 14쇄 2022) 29p
    • 모텔 몬티첼로의 간판인 거대한 치펀데일 하이보이 모양의 실루엣은 모텔이 나타나기 전부터 고속도로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건축과 간판은 반 공간적이다. 공간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을 우위에 두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공간을 압도하고 건축과 풍경의 요소가 된다. 하지만 이는 풍경의 새로운 스케일을 위한 것이다. (…)

      30년 전의 운전자는 공간 속에서 방향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원문은 72년에 쓰였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30년전은 40년대를 의미하는듯) 단순한 교차로에는 화살표가 그려진 작은 표지판까지 서서 이미 명백한 방향을 다시 확인시켰다. 누구든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교차로가 클로버 잎 모양으로 바뀌자 좌회전 하려면 일단 우회전 해야 했다. 이 모순적 상황은 앨런 다칸젤로의 작품에서 통렬하게 드러난다. 운전자가 그 위험한 곡선 미로의 역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시간 따위는 없다. 운전자는 표지(signs)에 의존해 길을 잡는다. 고속으로 통과하는 드넓은 공간에 서 있는 거대한 표시에.

      보행자 스케일에서 상징이 공간을 압도하는 현상은 거대한 공항에서 나타난다. 근 기차역에서의 동선은 택시에서 내려서부터 매표창구, 상점, 대합실, 플랫폼을 지나 객차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표지판이 없는 단순한 선형체계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건축가들은 “평면이 분명하다면 누구나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다.”면서 건물에 표지판을 반대한다. 하지만 복합적인 프로그램과 환경이라면 공간 속의 구조, 형태, 빛이라는 순수 건축의 세 요소를 넘어서는 복합적인 매체의 혼합이 필요해진다. 은근한 표현보다는 뚜렷한 소통의 건축이 요구된다.

      로버트 벤투리, 데니스 스콜 브라운, 스티븐 아이즈너,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한국어판(청하: 2017) 48-49p
    • 그래픽 디자인을 자유과로 취급하면 어떨까요? 공부해야 할 과목이자 숙달하면 다른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지식의 총체로서 말이죠. 어쩌면 가장 자유로운 예술일지 모릅니다. 자유로운 예술은 고유한 주제가 없으며, 그래픽 디자인은 항상 외부 콘텐츠와 함께 작동합니다. 다른 주제와 함께 작업할 때 적용되는 방식이죠. 어떤 면에서 하나의 분과로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저는 순환론적으로, ‘다른 분과의 규율이 없는 분과’라는 유용한 표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같은 책 18p) …… 연속 제작은 복제가 아니다. 복제는 고유한 원본의 존재를 암시한다. 복제할 수 없지만 생산 기술로 최대한 가깝게 모방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제는 항상 원본보다 열등하며 주로 기록으로서 기능한다. 반면에 제작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복제품이 아니라 현재 예술가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써서 주어진 작품 수만큼 제작하는 것으로, 제작 방법, 디자인, 기획 등에 따라 동일하거나 약간 다를 수 있다. 제작되는 작품의 수는 기법과 주제에 따라, 합리적인 가격을 얻기 위해 최소 50개에서 무한대까지 다양하다. 가격을 가치로 착각하는 사람은 이런 제작에 관심이 없다. (243p)

       

      이 책은 느슨하고 어수선할뿐더러 이따금 엉망입니다. 그래픽 디자인에 관한 그저 한 가지 태도일 뿐이죠. 이는 독자 또한 자신의 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려는 의도이자 그 자체로 책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해요. (314p)

      데이비드 라인퍼트,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 민구홍 옮김 (안그라픽스: 2024)
    • 마침내 여행은 타마라로 이어집니다. 여행자는 벽에 걸린 간판들이 여기저기 불쑥 튀어나온 좁은 거리로 들어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다른 사물을 의미하는 사물의 형상들입니다. 펜치는 이를 뽑는 사람의 집을 가리키고, 큰 잔은 술집을, 미늘창은 수비대의 막사를, 저울은 채소 가게를 가리킵니다. 조각상과 방패들은 사자, 돌고래, 탑, 별들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자나 돌고래, 탑 혹은 별의 기호인 무엇인가가-그게 무엇인지는 누가 알겠습니까-있다는 표시입니다. (…) 만약 어떤 건물에 간판이나 형상이 없다면 그건 도시 질서 내에서 그 건물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그 기능을, 즉 왕궁, 감옥, 조폐국, 피타고라스 학교, 사장차 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일들이 판매대 위에 진열해 놓은 상품들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한 기호로서 가치를 가집니다. 수놓은 머리띠는 우아함을, 금도금한 가마는 권력을, 이븐 루시드의 책들은 학식을, 발찌는 관능을 뜻합니다. 폐하의 시선이 글이 적힌 페이지 같은 거리를 훑고 지나갑니다. 도시는 폐하께서 생각해야 할 모든 것을 말하고, 자신의 말을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폐하께서는 타마라를 방문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저 도시가 자기 자신과 그 안의 모든 부분을 정의하는 이름을 기록하고 계실 뿐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2007) 19-20p
    • 표제음악이 유행한 19세기에는 음악으로 회화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화음’으로 풍부한 색채감을 만들어내는 작곡 방식이다.

      하나의 화음을 아르페지오로 펼치면 보다 풍성한 음향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색채적 효과를 더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바로 아르페지오 사이에 이탈하는 음들을 하나둘씩 뿌려놓는 것이다. 그러면 음악은 마치 푸른 강물에 분홍색, 노랑색 등 이질적인 색깔들을 점으로 찍어 넣은 인상파 화가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과 같이 색채적인 음향 효과를 낸다.

      윤희연 『감정, 이미지, 수사로 읽는 클래식』 (마티: 2021 2쇄), 165p
    • 오선보의 체계가 무너지고 그래픽적 요소들이 지면에 등장하자 “쇼팽의 곡을 쇼팽의 곡으로 만드는 본질적인 음구조”가 사라졌고, 무엇이 이 작품을 이 작품으로 만드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그래픽적 기보법을 사용해 이전처럼 음 구조를 기록하거나 연주자가 내야 할 소리들을 자세히 기록하는 것도 가능해졌지만, 그래픽 악보는 그 속성상 불확정적, 우연성, 혹은 알레아토리 음악이라 불린 사례들과 깊게 결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악보가 대체 어떤 소리를 낼지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었다. 이 작품의 모든 연주가 공유하는 지점이 있을지 판단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연주를 듣고 이게 무슨 작품인지 역으로 추측하는 일도 몹시 어져워졌다. 청음이야 할 수 있겠으나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연주의 결과였다. 그래픽 기보로 쓰인 불확정적 음악에서 어떤 작품을 바로 그 작품으로 만들어 주는 요인이 악보에서 사라지자 악보와 연주의 관계는 순식간에 훨씬 느슨해졌다. 동시에 정확히 무엇을 작품이라고 불러야 할 지 모호해졌다. 연주자의 선택과 상상력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소리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주자가 만든 음악은 여전히 ‘그 작품에 대한 연주’로 여겨졌다. 사실상 즉흥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주게 되더라도 유럽 전통이 뿌리내린 무대 위에서 연주자가 펼쳐 내는 사건은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으로 명명되었다. 작곡가는 어떤 연주자가 만들어 낸 소리를 예측할 수 없었고 그 선택에 관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 소리의 저자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 음악 작품의 저자이긴 하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오히려 작품의 저자가 되는 일이 더 손쉬워지기도 했다. 기호들을 일별해 놓고 그것을 ‘악보’라고 칭한다면 작곡가는 그 소리나 연주에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작품의 저자가 될 수 있었다. 작곡가가 작곡한 작품을 연주자가 사후적으로 수행한다는 구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래픽 기보는 ‘작품’이라는 개념을 세차게 흔들었지만 음악의 생산 구조만큼은 고스란히 유지됐고, 표현 방식만 바뀐 셈이었다.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 (워크룸 프레스: 2019) 49-51p
    • 소리를 암시하는 것은 당시 유행이었다. 소리의 암시는 시, 문학, 심지어 회화, 특히 20세기 초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클로드 드뷔시, 마누엘 데 파야, 모리스 라벨 같은 작곡가들에게 악기 소리는 종종 소음의 자리에, 게다가 소음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환기시키는 또 다른 악기 소리 자리에 놓인다. 이 날카로운 피아노 장식음은 물이다, 현악기의 이 떨림음은 바람이다, 오른손으로 연주한 장식 없는 간결한 테마는 목동의 피리 소리다… 무성 영화에서 어떤 소리에 대응하는 영상, 예컨대 종소리를 암시하는 종의 영상은 드뷔시에게는 호른 연주곡에 대응하는 피아노 테마와 동등하다.

      예를 들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파업>(1925)에서 노동자 봉기 시퀀스는 울리는 공장 사이렌을 집요하게 반복 클로즈업하여 시각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한동안 안 쓰이던 인서트가 다시 쓰이게 된 것은 두 가지 기능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서트는 거기에 줄곧 소리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소리의 원천을 보여주는 영상뿐만 아니라 그 장면 전체에서 소리가 연속으로 울리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몇몇 영화에는 이중 인화가 사용된다.) 다른 한편, 소리의 원천을 보여주는 영상은 시각적 후렴구가 되며, 군중이 쇄도하는 이 혼란스러운 시퀀스에 통일성을 부여하게 된다.

       

      미셸 시옹, 『영화, 소리의 예술』 이윤영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24) 22-23p
    • 하나의 일관된 목소리는 여러 작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관점들이 서로 뒤섞여 내재하면서 파편적이면서도 다양한 어조와 논조를 만들어내는 관점으로 바뀌지만, 그의 텍스트들은 설치 공간에 따라 구체화되고, 또 달라지는 변화의 양상을 띠게 된다. 텍스트 위주의 작업이 주가 되지만, 이러한 작업이 특정 공간 안에서 구현되고 설치될 때 미니멀리즘의 조각적 특징과 문맥들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는 평면성이 강조된 텍스트 작업이라고만 할 수 없는 지점들이 양가적으로 나타난다. 홀저의 작업에서 텍스트성만을 강조할 경우, 그의 작업은 마치 Book과 같이 읽히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방대한 양의 <경구들>과 <선동적 에세이>, 그리고 이번 서울관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당신을 위하여>을 고려한다면 수차례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독자로서 모두 읽어내기가 불가능한 텍스트들이기 때문에 ‘Book’과 같은 텍스트성으로만 그녀의 작업을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특히, 그의 작업은 이차원적 텍스트들이 실제적 공간 내에서 구체화되어 설치되었을 때 텍스트 작업은 실제 상황 속으로 파급되고, 독특한 문화적 맥락 내에서 재공명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것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했던 ‘메일 아트’가 텍스트의 정보력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파급력을 가지고 정보 자체가 하나의 미디엄으로 존재했던 논리가 비슷하다. 그 속에서 제니 홀저의 개인의 목소리는 철저희 배제되어 여러 화자들의 목소리가 중첩되고, 겹쳐지면 또 논쟁하는 ‘복수성’을 경험하게 된다.

      정연심, 「제니 홀저의 컨(텍스트) 작업: 그들의 목소리로 받아쓰기」, 『Jenny Holzer: For you』 (국립현대미술관: 2020) 69p